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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토요판]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 랭보에게서 이영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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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에게 그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속으로 무심코 저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도 놀라버렸을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한다. 내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라는 말을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말로 조용히 바꿔보았을 한 사람 말이다.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 의해 사랑이 발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정이 아닌가? 사랑과 동정을 혼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우리는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요즘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권여선의 소설 ‘봄밤’을 읽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영광과 권여선을 함께 떠올리고는 한다. 1965년에 태어나 안동에서 자랐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니다. 작품으로 판단하건대, 인간의 약함을 누구보다 연민하지만 그 안에 자기를 용서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섞지 않는 두 사람이어서다. 그렇다.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먼저 인간 모두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냥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디선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시의 ‘너’는 산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그래서 이 시의 ‘나’ 역시도 이렇게 시를 쓰면서 내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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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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