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 이슬아

연애가 끝나서 자꾸 눈물이 났던 작년 어느 날에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슬플 땐 많이 걸어. 그럼 길 여기저기에 슬픔을 두고 올 수 있거든.

 

이렇게 애쓰는 이유는 우아해지고 싶어서다.

 

/나는 아직 누구를 너무 좋아하는 동안 그 사람에 대해 의연해지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고 혼자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는 날이 있다. 그런 실패뿐인 날에는 열심히 뛰어서 땀을 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오는 수밖에 없다.

/ 내가 혼자 걷고 있단 걸 믿을 수 없어서 괜히 뒤를 돌아볼 때도 있다. 그럴 땐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애를 모르고도 잘 살았던 시간을 상기해본다. 나의 근사한 친구들과 스승들의 얼굴도 떠올려본다. 연애 말고도 중요한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고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일해야 하며 월세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그 애를 그리워하느라, 더 사랑받길 원하느라 시간과 마음을 흘려보내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주 실패할 게 분명하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의연하고 싶어 가슴속 꽃밭 대신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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