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깨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깨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렬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어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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